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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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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비잔티움
정가 ₩38,000
판매가 ₩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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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글항아리
ISBN 9788993905380
출간일 201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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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세의 ‘몸통’이자 ‘꼬리’였던 비잔티움은 그다음 역사의 주역들이 등장한 근세의 여명기부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 역사를 혹독하게 부정당하고 매도당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비잔티움을 가리켜 “공허한 의례와 복잡다단한 관료제에 집착하는 허약하고 소심한 사람과 부패한 환관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한 전제국가”라며 무가치하다고 말했고 볼테르 또한 “인간 정신에 대한 치욕”으로까지 말하며 비잔티움을 철저히 깔아뭉갰다.

『비잔티움-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는 힘껏 창을 던져 이러한 침울한 잔상들을 품고 있는 거울을 깨뜨리고자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0여 년 킹스칼리지, 프린스턴대 등에 적을 두고 발굴 현장과 연구실을 오가며 오로지 비잔티움의 역사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교직에서 퇴임한 후 자신의 비잔티움사 연구를 총괄적으로 담아낸 이 책을 써냈다.

저자는 책에서 비잔티움은 숙련된 관료제와 조세제도 위에 세워진 황제 정부, 로마법에 기초한 법률조직, 고전과 이교적 과목이 다수 포함된 세속적 교과과정, 정교회 교리, 그리스 교회에 보존된 예술과 영적 전통, 많은 나라들이 앞 다투어 모방한 대관식과 궁정 의례를 후대에 유산으로 남겼다고 말한다. 비잔티움은 전혀 수동적이지 않았으며 소중한 전통과 유산을 화려하게 되살려낸 능동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나라였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목차

서문: 비잔티움의 또 다른 역사

제1부 비잔티움, 찬란한 역사의 발을 내딛다
1장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2장 기독교계 최대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3장 동로마 제국
4장 그리스 정교회
5장 거대한 위용, 성 소피아 성당
6장 라벤나 모자이크
7장 로마법

제2부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다
8장 이슬람에 맞선 보루
9장 새로운 기독교 미술, 성상
10장 성상파괴와 성상숭배
11장 개명된 사회
12장 ‘슬라브족의 사도’ 성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

제3부 중세 국가를 완성하다
13장 그리스의 불
14장 비잔티움의 경제
15장 비잔티움의 환관
16장 비잔티움의 궁정
17장 ‘자주색 방에서 태어난’ 아이들
18장 아토스 산
19장 베네치아와 포크
20장 ‘불가르족의 학살자’ 바실리우스 2세
21장 11세기의 위기
22장 안나 콤네나
23장 세계의 중심, 비잔티움

제4부 코스모폴리탄적 사회
24장 십자군의 지렛대
25장 트레비존드, 아르타, 니케아, 테살로니카의 탑들
26장 반역자와 후원자
27장 “교황의 삼중관보다는 차라리 투르크족의 터번을”
28장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맺는 말: 비잔티움의 위대성과 유산

저자소개

주디스 헤린 , 이순호

출판사리뷰

“비잔티움은 부유했고 바다를 지배했으며 위세를 떨친 제국이었다.
이 책은 비잔티움이 그 이상의 존재였음을 파헤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당나라와 비잔티움의 차이점은?
몽테스키외로부터 시작된 비잔티움 왜곡사

“헤린의 희망은 비잔티움을 휘감고 있는 퇴폐의 아우라를 떨쳐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책에서 이 제국이 그 자체로 위대하고 창조적인 문명이었음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에드워드 기번 등이 천명한 후부터 종종 반복되어 말해진 것처럼, 1천 년간 서서히 쇠락해왔다는 식으로는, 결코 비잔티움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Roger Gathman, Austin American-Statesman

당과 비잔티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공통점부터 보자. 둘 다 같은 시기에 동서의 양쪽에서 최대 판도의 제국을 형성했고 수도 장안과 콘스탄티노플은 전 세계 각양각색의 민족이 모여든 문화와 교역의 중심이었다. 차이점은 비잔티움이 1천 년이 넘게 존속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반면 당나라는 고작 300년을 유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당나라가 현재의 중국이라는 후계자를 둔 반면, 비잔티움은 그 화려한 문명을 어느 정도라도 계승한 현대 국가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중국 정부는 발굴과 기념화 작업을 통해 옛 장안의 영광을 되살리고 있지만, 비잔티움은 황금, 모자이크, 비단, 황궁과 같은 찬란한 중세 예술의 뒤안길에 묻혀버렸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세의 ‘몸통’이자 ‘꼬리’였던 비잔티움은 그다음 역사의 주역들이 등장한 근세의 여명기부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 역사를 혹독하게 부정당하고 매도당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비잔티움을 가리켜 “공허한 의례와 복잡다단한 관료제에 집착하는 허약하고 소심한 사람과 부패한 환관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한 전제국가”라며 무가치하다고 말했고 볼테르 또한 “인간 정신에 대한 치욕”으로까지 말하며 비잔티움을 철저히 깔아뭉갰다. 물론 이런 비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비잔티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 또한 “서유럽의 야만족 국가들과 세계의 정세를 변화시킨 혁명들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점을 제외하면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는 국가”로 보았다. 그는 시종 비잔티움을 그리스-로마와 ‘수동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던 보잘것없는 나라로 설명했다. 이런 작업들의 최종점에 19세기 아일랜드 역사가 윌리엄 레키(1838~1903)가 퍼부은 거리낌 없는 독설이 등장한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예외 없이 모두 열등하고 비루한 문명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위대함의 모든 형태와 요소가 그토록 철저하게 결여된 문명은 없었으며, ‘천박한’이라는 문구가 그처럼 잘 어울리는 문명도 없었다…비잔티움 제국사는 사제, 환관, 여자, 독살, 음모, 배은망덕함으로 점철된 단조로운 이야기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보편화된 비잔티움에 대한 역사적 잔상이다.

비잔티움 역사, 전면적으로 다시 읽기
“획기적인 접근이다. 비잔티움의 종교, 정치, 예술, 전쟁, 젠더 등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 저자의 스타일은 개성적이며 무엇보다 살아 있다.”-The Atlantic

『비잔티움-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는 힘껏 창을 던져 이러한 침울한 잔상들을 품고 있는 거울을 깨뜨리고자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0여 년 킹스칼리지, 프린스턴대 등에 적을 두고 발굴 현장과 연구실을 오가며 오로지 비잔티움의 역사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교직에서 퇴임한 후 자신의 비잔티움사 연구를 총괄적으로 담아낸 이 책을 써냈다. 그녀는 책에서 비잔티움은 숙련된 관료제와 조세제도 위에 세워진 황제 정부, 로마법에 기초한 법률조직, 고전과 이교적 과목이 다수 포함된 세속적 교과과정, 정교회 교리, 그리스 교회에 보존된 예술과 영적 전통, 많은 나라들이 앞 다투어 모방한 대관식과 궁정 의례를 후대에 유산으로 남겼다고 말한다. 비잔티움은 전혀 수동적이지 않았으며 소중한 전통과 유산을 화려하게 되살려낸 능동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나라였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국내 비잔티움 관련 도서 지형과 이 책 출간의 의미
“비잔티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헤린이 그려낸 범위와 형태는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트레비존드의 탑, 상징물들, 궁정의 환관과 그리스의 불과 같은 비장의 무기 등을 맛깔스럽게 묘사함으로써 호기심은 많지만 참을성은 없는 오늘날의 독자들을 성공적으로 끌어당긴다.”-G. W. Bowersock, New York Review of Books

이 책의 출간은 비잔티움에 대해 막연한 중세 기독교 국가 이미지와 고색창연한 예술의 발원지로만 이곳을 이해하고 있는 국내 독자들에게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한국에는 비잔티움 관련 도서들이 여러 권 나와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비잔티움 역사에 대한 ‘오해’에 가까운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는 비잔티움사 최고 권위자인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가 저작한 훌륭한 길잡이이긴 하나 1940년 초판이고 그나마 국내에선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해볼 수 없다. 그 외에 비잔티움은 예술과 종교 분야에 치우쳐 소개되어 있으며, 비교적 근자에 나온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훌륭한 읽을거리가 되어주고 있으나 전문 역사학자의 저술이 아니라는 점에서 최신 고고학적 발굴의 연구성과 반영 등에 있어서 아쉬운 대목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주디스 헤린 교수의 이 책은 40여 년간 비잔티움의 역사를 발굴하고 연구해온 권위자가 총 28개의 테마를 통해 비잔티움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인문교양적’ 취지 아래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90여 명의 황제와 125명에 이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수많은 전쟁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존의 연대기적 서술의 어마어마한 방대함은 대중들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계 최대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 그리스 정교회, 성 소피아 성당, 라벤나 모자이크, 이슬람에 맞선 보루, 비잔티움의 경제·환관·궁정, 비잔티움이 배출한 걸출한 여성 역사가 안나 콤네나 등 오랫동안 비잔티움을 천착한 사람만이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주제들을 잘 제어된 역사적 의미망으로 일궈내고 있다.

이념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제국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다루지만 각 장들은 전혀 난삽하지 않으며 책의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문체를 유지한다.” - J. W. Nesbitt, Choice

저자는 어떤 근거를 통해 비잔티움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비잔티움은 과도한 부, 찬란한 금은보화, 지식인, 역량 있는 군 지휘관, 혁신적인 신학자를 많이 배출했으면서도 음모, 암살, 신체절단이 공존한 표리부동하고 모호한 사회였다. 하지만 비잔티움은 종교재판소를 만들지도 않았고 범법자를 화형시키는 데도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와 위대한 예술품 및 뛰어난 제도적 유산은 역사적 편견을 단숨에 날려버리게 한다. 그러고 나면 비잔티움 역사의 특징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그 특징으로 첫째, 비잔티움은 중세 내내 지중해 동부, 발칸 반도, 서유럽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끼친 1천 년 역사를 가진 문명이었다. 둘째, 비잔티움이 이교와 기독교적 요소, 그리스와 로마적 요소, 고대와 특히 중세적 요소를 고루 갖춘 문명이었다는 것이다. 비잔티움의 문화, 예술적 특징이 오늘날 영원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외교 인력과 민간 관료들을 갖춘 궁정, 황제의 대관식, 여성의 정치력 행사 등 정부의 기본 형태와 관련된 모든 요소도 비잔티움에서 발전해 나왔다. 거대한 제국의 중앙에 자리 잡은 콘스탄티노플의 위용 또한 대대로 계승된 황제정부 제도와 그것에 영감을 불어넣은 다양한 원천과 더불어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강력한 확신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탄탄한 바탕을 갖출 수 있었기에 비잔티움은 기독교 이전 시대의 고대 그리스 및 로마와 기독교 사상에서 발원하고, 이념성과 실용성(철학적 논쟁과 군사적 축성이 그 좋은 예다)을 고루 갖춘 뿌리 깊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7세기와 11세기에 불어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플라톤을 발굴하여 퍼뜨린 비잔티움 학자들

비잔티움 제국의 정체성은 언어의 연속성으로 강화되었다. 같은 언어를 쓰다 보니 고대 그리스 문화와 쉽게 연결되어 중세 학자들이, 고대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의사들의 저작을 보존하고 주석을 달고 편집하는 일이 촉진됐다. 호메로스 시를 찬미하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중요한 초판본을 발행한 곳도 다름 아닌 비잔티움이었다. 극장 공연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들도 면밀히 연구되고 여러 세대의 학생들에 의해 암송되었다. 학생들은 데모스테네스의 연설과 플라톤의 대화도 학습했다.

서방의 예술과 학문도 1204년부터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비잔티움 예술품 덕에 부활했다. 14세기에는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서 대학 교수로 활약하며 제자들과 함께 플라톤 저작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무슬림 세계를 통해 서방에 일찍이 전해졌으나 쏇라톤 철학은 그때까지도 아직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동서 교회의 재통합으로 이어진 1439년 피렌체 공의회 때는 유명한 그리스 학자 겸 철학자 게오르기우스 게미스투스 플레톤이 플라톤 철학을 주제로 공개 강연을 했다. 그에 감화되어 코스모 데 메디치는 나중에 플라톤 아카데미까지 창설했다. 비잔티움은 이렇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에는 난민들이 원고를 싸 짊어지고 도시를 탈출해 서방의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더욱 활짝 꽃피게 해주었다. 그 몇십 년 뒤 서방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는, 종교개혁자들이 성상을 비난하면서 보다 영적인 기독교 예배 형식을 찾다가 8세기와 9세기 비잔티움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수집한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에서 그 대안을 찾기도 했다.

비잔티움의 법률체계와 군사전통 해부

비잔티움은 로마의 기술과 공학기법을 이용하여 수도교, 요새, 도로, 교량도 지었다. 1천 년 뒤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돔이 얹혀 있었고 지금도 6세기 때의 장엄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 같은 대건축물도 축조했다.

비잔티움은 로마로부터 선진 법률체계와 군사 전통도 물려받았다. 비잔티움의 장구한 역사를 지탱시켜준 것이 그 두 가지 요소였다. 이론상 비잔티움은 법치주의 국가였다. 그에 따라 제국은 법관을 훈련시키고 녹봉을 주어 송사를 해결하도록 했다. 제국의 신민들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법에 호소하여 법관의 판결을 받았다. 저 유명한 로마군단은 7세기 이후 점차 사라졌지만 비잔티움 보병대와 기병대의 전투 병력은 로마의 군사교범에 따라 훈련받았다. 육해군의 병법, 공성 무기, 군대의 지원 방식, 갑옷과 보호 장비들도 로마의 관행을 따랐다. 다만 한 가지, 물에서도 타도록 만들어진 유황 성분의 ‘그리스의 불’은 비잔티움의 발명품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국가 기밀사항으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지금도 그것의 구성 성분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아랍인들도 그와 비슷한 무기를 만들었으나, 해전 때나 도시에서의 공성전 때 그리스의 불은 그것을 처음 접하는 적군들에게 지속적으로 끔찍한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비잔티움은 또 중세의 아말피와 베네치아처럼 국제무역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이탈리아의 해안 도시들도 보호하고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러다 이윽고 그 도시들은 비잔티움을 추월해 경제 중심지가 되고 우수한 해군 및 상업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들이 비잔티움에 빚진 사실은 뚜렷이 남아 있다. 그 도시들의 성당만 해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된 청동 문이 달려 있고 성당의 내부 또한 비잔티움 양식의 대리석, 모자이크, 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렇게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비호 아래 번영을 이루었다.

유럽을 무슬림의 팽창으로부터 지켜준 ‘1천년 방패’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빛나는 연구를 통해 저자는 무슬림의 서유럽 진출을 막아내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전통에 기초를 둔, 하지만 역동적인 이 제국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Publishers Weekly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비잔티움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중세 초 기독교 서방의 보루가 된 점일 것이다. 7세기 무렵 아라비아 부족들이 새로운 종교 이슬람에 고취되어 지중해 동부 태반을 점령했다. 비잔티움은 파죽지세로 진격해오는 아라비아 세력을 비잔티움이 소아시아에서 차단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발칸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아주었다. 실제로 아랍인들은 634년부터 644년까지 회오리바람 같은 원정을 실시하여 그 목적을 대부분 달성했다.

만일 비잔티움이 678년에 이슬람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면 무슬림 세력은 콘스탄티노플의 재원까지 확보하여 발칸 반도, 이탈리아 그리고 정치적 분규로 방어의 공조를 이룰 희망이 없었던 서방으로까지 이슬람을 전파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근대 유럽은 이슬람 정복의 개연성을 막아준 비잔티움 덕에 탄생한 것이었다. 비잔티움이 이슬람 팽창을 저지해주었기에 작은 지역들로 쪼개져 있던 서방의 기독교 세력은 시간을 갖고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비잔티움이라는 ‘1천 년의 방패’가 없었다면 오늘날 유럽은 어쩌면 무슬림들의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이 중요했다

『기독교계의 형성The Formation of Christendom』을 펴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세인들은 현대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세의 종교적 세계는 통합과 분열을 일삼은 기독교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다신교도,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신봉자, 동방의 이교 추종자, 오래전에 확립된 유대인 공동체 등 잡다한 신앙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슬람도 지중해 동부와 남부, 시리아와 에스파냐, 그 사이에 사는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8세기에는 비잔티움에서 시행된 최초의 성상파괴운동 때문에 일반인들이 성상을 위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성상을 철저히 금지한 이슬람과 달리 로마 교회는 그것을 옹호했다. 샤를마뉴의 신학자들도 성상 파괴를 지지한 본래의 태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8세기와 9세기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연관된 세 개의 지역이 형성되었다. 바로 동방의 비잔티움, 남방의 이슬람(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서방(유럽)의 라틴 지역이다. 그것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비잔티움의 특기할 만한 존재들: 환관과 여성

비잔티움을 지탱시킨 데에는 황제, 군인, 성직자, 귀족들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로마와 확연히 구분되게, 또 서방 사람들이 놀랄 만큼 환관과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진 곳이기도 했다.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환관의 역할은 한계가 분명했다. 자유민 로마인들은 거세를 참을 수 없는 굴욕으로 여겼으며, 환관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런 탓에 로마인들은 환관을 전쟁포로인 비로마계에서 충당하곤 했다. 그에 반해 비잔티움 환관들은 궁정에서의 입지가 튼튼할뿐더러 무리 없이 사회에 수용되었고, 법률적으로도 신분을 보장받아 제국 내에서 존재가 두드러졌다. 황족과 관련된 은밀한 임무는 모두 그들에게 맡겨져 환관은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사춘기가 되기 전 혹은 성인이 되어 거세된 그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예술의 관대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황궁을 힘을 강화시켰다. 환관은 나약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군대의 지휘관으로서도 활약했다. 또 비잔티움 교회는 서구 기독교와 달리 거세된 자도 성직자로 받아들였다. 환관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되고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물론 야망을 품은 환관들이 책략을 부린 예가 없지 않다. 황제 부부와 붙어 지내면서 전적인 신뢰를 받았던 그들은 외부인들의 이용 수단이 되기 일쑤였고, 그들 스스로도 막강한 힘을 휘두르려 했다. 그리하여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과도한 힘을 지닌 환관대신들이 군주를 압도하려 했다며 비난을 쏟아붓곤 한다. 가령 5세기의 크리사포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테오도라 황후 밑에서 환관장을 지낸 6세기의 유프라타스, 여제 이레네의 총애를 받기 위해 서로 간에 경쟁을 벌인 스타우라키우스와 아이티우스 등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책략을 부린 존재만이 아닌 제국의 중요 기반이었음을 이 책은 주목하고 있다.

비잔티움에 관한 내로라하는 책들 치고 12세기의 황녀 안나 콤네나를 다루지 않은 것은 없다. 이 책 역시 여류 역사가 콤네나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녀는 비잔티움 최고의 역사가이자 가장 명성을 떨친 아버지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전기 『알렉시아스』를 집필한 저자였다. 즉 투키디데스나 헤로도토스의 고전적 연구 방법을 따라 철저하게 사료들을 근거로 연구한 대단한 역사가였다. 주디스 헤린 교수는 특히 『알렉시아스』가 여류 사가의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12세기 무렵 서방에서는 힐데가르트, 마리 드 프랑스 등 여류작가의 활동이 왕성했지만, 콤네나처럼 역사서를 쓰려고 시도했던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알렉시아스』는 엄청난 대작이었다. 그 책은 난해한 어휘와 고대의 격언으로 가득 찬 고색창연한 본토 그리스어로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또 지극히 세련되고 까다로운 문체로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대단했다. 주디스 헤린은 이 책의 저자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수많은 오해들을 반박하고 해명하면서 그녀의 대담함, 참신함, 의외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나아가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장님으로 만들고 스스로 여제가 되어 5년간 제국을 단독으로 통치했던 여제 이레네, 11세기의 조에와 그녀의 동생 테오도라 등 비잔티움 제국의 한 축은 여성들이 만들어간 것이기도 했다.

유적 발굴과 비잔티움사 연구의 과제

저자 주디스 헤린은 그리스, 키프로스 섬, 콘스탄티노플 중심에 있는 칼렌데르아네 모스크의 발굴 현장에서 비잔티움 문명의 토대가 되는 물질문화로 연구를 수행해왔다. 크레타 섬과 그리스 남부 해안 앞바다의 키테라 섬의 교회들을 탐사하고, 키프로스 섬 남서쪽의 쿠클리아에서 발굴한 도기들로 중세 비잔티움 문화권의 생활상도 연구해왔다. 키프로스 섬의 파포스에서 수행한 첫 발굴 작업에서는 1222년 지진 때 희생된 여인의 해골을 사란다 콜론네스 성 유적지에서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여인의 손에는 금반지와 진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유적 발굴은 그녀의 비잔티움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한 팀원의 성과도 굉장했다. 한 유적복원 팀원은 성모가 성 시메온(949년경~1022, 비잔티움의 수사)에게 아기예수를 건네는 모습으로 확인된 초기 기독교 시대의 모자이크 각석을 발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이것은 성상파괴 논쟁의 중요한 자료이다). 또 1261년 라틴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탈출할 때 서방 수도승들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이 담긴 프레스코화의 훼손을 막기 위해 예배당 전체를 벽돌로 막아놓은 것도 찾아냈다(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저자는 책을 집필함에 있어서도 유적 발굴과 현장 답사가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성상파괴 논쟁 때(7~9세기) 수많은 유산들이 파괴된 탓에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한정된 발굴자료로만 연구를 수행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여러 지점에서 분분한 논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점은 매우 주의해서 봐야 하는데, 한 예를 들면 이렇다. 비잔티움 제국이 통치하던 기간 내내 운명을 함께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금화(솔리두스, 베잔트)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668~820년에 주조된 주화들은 코린토스, 에페소스, 사르디스, 아프로디시아스, 페르가몬 유적지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성상파괴 논쟁이 일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런 결락缺落에 대해 비잔티움 경제가 물물교환 형태로 바뀌어 세금도 물납세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니케포루스 1세 황제(재위 802~811)의 정책이나, 또 콘스탄티노플 이외의 지역(시칠리아의 서쪽 지방, 이탈리아 남부, 북아프리카)에서 소량이지만 이 시기 주화가 발견되기에 이런 해석은 반박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 많은 역사가들은 난감함을 역력히 드러낸다. 주디스 헤린은 이것이 바로 고전학자들이 발굴지를 취사선택해서 생긴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세보다는 고대에 관심이 많았던 그들이 발굴한 도시들은 성채도시로 변하거나 일시적으로 버려지기도 하는 등 적국의 침입과 성상파괴 분쟁 기간에 특히 쇠퇴한 곳들이다. 따라서 제국 동쪽 국경지역의 성이나 요새화된 지역들을 발굴하면 그 시대의 주화가 더 많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실리우스 2세의 재조명

이 책은 이러한 내용 외에도 ‘불가르족의 학살자’로 명명되는 바실리우스 2세에 대한 평가를 당대인들의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고, 성상옹호와 파괴의 논쟁이 치열했던 것의 이면에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벨기에의 위대한 역사가 앙리 피렌조차 간과했던 이슬람 세력에 대항한 비잔티움의 역할과 그것이 오늘날 유럽을 있게 한 점을 규명하며,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던 성 소피아 성당과 라벤나 모자이크 등을 통해 예술이 제국을 지탱시켰던 그 위력 등에 대해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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