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최근 역사학의 새로운 추세는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며, 하나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 가령 야비하게만 그려졌던 삼국지의 조조를 결단력있고 과감한 지도자로 묘사한다거나, 광해군을 폭군이 아닌 실용적 외교 노선을 표방한 군주로 보는 시각 등이 그렇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저자는 지도제작자의 예를 들어 논지를 펼쳐 나간다. 지도가 있다. 아무리 정교하고 자세하게 지도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다. 더군다나 지도가 묘사하려는 영역과 같은 크기로 지도를 제작한다면 그것은 이미 지도가 아니다. 저자는 역사가와 지도제작자를 비교한다. 역사가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단지 묘사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최대한의 진실에 접근한다. 따라서 저자는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해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의 진리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초보자를 위한 역사학 입문서이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관에 대한 효과적인 반박을 펼치고 있는,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이을만한 책이다.
목차
서문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1. 역사의 풍경
2. 시간과 공간
3. 구조와 과정
4. 변수의 상호종속성
5. 카오스와 복잡성
6. 인과관계, 우연성, 반사실적 사유
7. 마음을 소유한 분자
8. 역사가의 눈으로 보기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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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존 루이스 개디스 , 강규형
출판사리뷰
최근 몇십 년 동안 역사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들이 머리를 들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 이론은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며, 따라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상대주의). 게다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이 문제에 결부시키면, 과거에 일어났던 것을 객관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무용한 행위로 귀착된다. 따라서 저자인 개디스는 자신이 그 모범으로 삼고 있는 마르크 블로크와 E. H, 카(그에 대한 존경은 마르크 블로크에 비해 조건적이다)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자신의 방법으로 이 두 가지 문제에 답한다. 그는 이 책에서 포스트모던니스트나 해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역사에는 진리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보하여 그러한 사실에 전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함수에서의 곡선처럼 아주 가깝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책이 주는 구성 요소들로, 여기에서 저자가 역사 서술을 위해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은 우리가 쉽게 따를 수 있는 상식적인 것들이다. 그는 이 상식적인 것들의 내적 작업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수동적이고 직관적인 지식들을 활동적이고 실질적으로 전환하는 행위다. 대학에서 영향력이 큰 해체주의자들의 이론을 파괴하는 그의 저작은 따라서 대단히 시의 적절하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서 역사가 우리를 잘못된 도그마 속에 감금시킬 수 있거나 또는 과거로부터 해방시킬 가능성을 일깨워줄 방법을 토론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가는 사회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속박하는 만큼 과거는 자유롭게 되고, 따라서 역사가의 사유 목적은 억압과 해방의 양극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역사적 진실은 존재하는가” 하는 중심적인 질문으로 넘어간다. 여기에서 그는 몇 가지의 은유들을 사용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역사가를 지도제작자와 비교한 것이다. 지도가 묘사하려는 영역과 같은 크기로 지도를 제작하는 것은 복제에 불과하며 불가능할 뿐더러 실용적이지도 않다. 역사가 역시 과거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단지 묘사할 뿐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이란 묘사를 통해 그 어떤 것을 추출해내고, 그럼으로써 진실에 접근해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면 역사는 과학인가? 개디스는 상식적인 개념, 다시 말해서 역사는 자연과학과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주장을 대치시키기 위해 카오스 이론과 복잡성 이론을 도입한다. 그는 역사가 더욱 과학적이 된 게 아니라 과학이 더욱 역사적이 되었다고 밝힌다. 과학은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이론으로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뉴턴의 세계, 즉 선형적인 이론을 포기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실험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유 실험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현장으로 갈 수 없는 역사가의 입장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비선형적 과학 이론들이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과학이나 역사에서 원인을 결정하는 것은 단지 독립변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종속변수들의 상관관계이다. 이외에도 오늘날의 역사와 역사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이론들을 도입하는데 ‘프랙탈’이나 ‘상전이(phase transitions, 相轉移) 등의 개념을 도입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그의 선조들(마르크 블로크와 E. H. 카)의 모범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가의 사유 목적을 밝힌다.
그것은 첫째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 다음에는 사회 내에서, 그리고 억압과 해방이란 양극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세상에 발을 디딜 때부터 완전히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억압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선입관이나 제약,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 대한 관심도 없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게 되고, 경험과 교훈, 의무를 통해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최소한의 균형을 터득한다. 그러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어른이 되면 어떨까? 완전한 억압과 완전한 해방은 노예 상태로 나타난다. 자유는 상반되는 이 둘 사이의 긴장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그 긴장이란 보편적 지식과 구체적 경험, 의존과 자율, 그리고 드러냄과 은밀함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엔 조사 방법에 있어 독립변수에 대한 믿음이나 환언주의의 우수성(사회과학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 서로 상호종속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으로 볼 때 해박한 역사 지식 없이도 자식이 성인으로 자라는 데 훌륭하게 도운 경우는 많다.
그렇다면 사회와 그 사회의 개인의 역할은 어떤가? 억압과 해방의 균형이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듯 사회 체제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회체제의 경우에는 역사라는 학문 없이는 불가능한데, 이는 역사를 통해서만 한 문화의 바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균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은 배워야 할 기술이 되었다. 결국 여기에서 역사가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재와 미래와 과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이다. 이는 과거에 책임을 물으면서도 과거를 존경하려는 사회의 마음가짐을 의미하며, 뿌리뽑기보다는 개선하는 데 익숙한 사회, 도덕성을 도덕적 불감증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를 의미한다. 비록 역사의식이 이런 사회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 있지만, 그러나 증명된 대로 사물의 영역 내에서는 다른 연구 방법보다 과학적 방식이 가장 포괄적인 합의를 모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방법도 인간사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상대적으로 사회과학에 비교하여)에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