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00년대 중반 모로코.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 상태에 놓여있지만 독립을 향한 기운이 한창 무르익은 때,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소년이 베일에 가린 선발 절차에 의해 왕국의 왕세자와 한 학급에 배정된다. 그렇게 운명에 의해 장차 왕이 될 사람의 측근이 된 자, 그가 자신의 별을 과신하여 야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긴 유배의 세월 끝에 부여받은 왕국의 사료편찬관이라는 은총에는 또 무엇이, 어떤 장난이 숨어 있을까.
왕의 말과 글을 담당한 한 남자의 고백이자 모로코의 하산 2세가 되는 남자의 초상을 그린 소설로, 문학가이자 시인이며 역사가인 주인공이 거듭되는 은총과 실총 속에서 신하이자 남자로서 왕과 벌이는 심리전이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2020년 ‘공쿠르상’ 최종심과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대상’ 최종심에 오른 작품이다.
목차
제1부007
2부067
제3부127
제4부195
에필로그327
저자소개
마엘 르누아르 , 김병욱
출판사리뷰
‘왕국의 사료편찬관’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를 통해
모로코의 근현대사를 대담하게 펼쳐낸 소설.
철학 교수이자 작가인 저자 마엘 르누아르가 18세기 판版 『천일야화』와 생시몽의 『회상록』을 놀라운 솜씨로 20세기에 옮겨놓은 이 소설은 강대국의 ‘보호령’ 시대가 저물고 ‘납의 시대’가 개막하기까지의 모로코의 역사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이내믹하게 펼쳐낸다. 정치적인 음모와 권력의 관계에 관한 주제로 여러 권의 작품을 발표한 마엘 르누아르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납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정적을 가혹하게 탄압한 하산 2세의 시대를 문학의 소재로 예리하게 포착했다. 왕궁의 백스테이지에서 사료편찬관의 시선을 통해 재조명한 모로코의 근현대사, 또는 한 남자의 초상을 그린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주인공이자 나레이터인 압데라마네 엘자립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나는 왕의 총애를 받은 적도 잃은 적도 많았다. 어느 경우든 대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콜레주 루아얄에서 장남 왕세자와 같은 학급에 배정되었다.” _ 9p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에 위치하며 동북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한 아랍-베르베르 국가 모로코. 왕국의 화려한 역사가 강대국의 ‘보호’하에 가려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독립의 기운을 뿜어내던 시기에,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장차 왕국의 왕이 될 왕세자의 동급생으로 선발된다. 왕세자의 아버지인 현재의 왕은 아들을 엄격하게 키운다. 특혜란 없다. 오히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해 유급이 거론된다. 그가 유급한다는 것은 그의 동급생 모두의 유급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주변국들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졸업을 지연시키는 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우세하다. 보호령에서 독립국이 될 긴박한 국제 정세, 호시탐탐 왕정을 전복하려는 국내 반대파들 사이에서 왕세자는 운명이 언제라도 그에게 지울 책무들을 즉시 감당해야 하므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 더 갖추고 익혀야 할 것이 많으므로.
왕세자의 동급생들 역시 언젠가 자신들의 동기가 왕이 되는 순간 그의 부름을 받게 될 거라는 암묵적인 기대하에, 저마다 왕국의 미래를 짊어질 준비를 향해 떠나간다. 날이 갈수록 확실해지는 독립에 대한 전망이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었고, 언젠가 왕정이 제대로 시행되는 날, 왕세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자신들이 누구보다 먼저 국가 핵심 그룹의 단단한 핵을 구성하는 데 불려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운명에 의해 미래의 모로코 국왕 하산 2세의 측근이 된 압데라마네 엘자립은 권력에 가까이 있고자 한 동기생들과 달리, 아버지 왕의 은총으로 프랑스 파리에 유학해서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장차 문학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향해 공부에 매진한다. 그가 왕세자와 함께 공부했다는 자신의 별을 과신하여 야망에 선을 긋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총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가 우등생 명부에서 번번이 왕세자의 윗자리를 차지한 것도 이미 장차의 위험을 내포한 일이다.
프랑스에서 문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독립국이 된 아버지 술탄의 왕정에서 교육부 장관실에 기술 고문으로 배치된다. 식민 통치의 유산인 교육제도를 수습하고 확장하는 일은 박식한 그에게 딱 맞는 일이다. 몇 년 후 술탄이 서거하고 동급생이던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동기생들이 속속 요직에 오르고 압데라마네에게도 과도한 충성발언들이 생겨나면서 그에게 합당할 여러 직책이 거론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그에게 특별히 만들었다는 직무를 수행하라고 명한다. 누가 보더라도 유배나 마찬가지인 직책이다. 이 갑작스러운 따돌림의 동기는 무엇인가. 여러 억측이 떠돌았으나,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고 근거도 없다. 그가 자신의 별을 과신하여 야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왕이 그를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것인가, 그러기 위해 왕은 어떤 이유를 짜내었을까.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_블레즈 파스칼
모로코 왕국 남서부, 광활한 사하라 사막을 마주한 작은 도시 타르파야. 그곳에서 주인공은 체스를 두고 그 지역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가끔은 광대한 사하라를 바다로 개척해 모로코를 해양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연구도 하며, 유배의 세월을 견딘다.
이제 영 틀려버린 건가? 왕은 나를 잊은 건가. 실총의 7년이 흐른 어느 날, 왕은 그를 다시 불러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라신이나 루이 15세 때의 볼테르 등이 맡았던 역할, 즉 왕국의 사료편찬관 직에 임명한다. 유배를 당할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왕에게서는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으나, 이 박식한 고문으로선 기뻐해 마지않을 은총이다. 하지만 이 은총의 이면에는 또 무엇이, 자신을 먹이로 삼는 어떤 장난이 숨어 있을까. 정체불명의 한 젊은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왕국에서 은밀히 조직되고 있는 반도들의 비밀을 속삭여줄 때, 시험대에 오른 그의 충성심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1940~70년대 모로코의 독특한 정치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우여곡절이 많은 모로코 근현대사를 소설이라는 멋진 장치를 통해 한 편의 팩션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냈다. 소설에는 박식한 사료편찬관이라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걸맞게 역사적 사실 외에도 문학적 수사가 곳곳에 빼곡하다. 프랑스의 고전적인 저자들, 특히 파스칼의 말을 즐겨 인용하다 가끔 오용하여 일을 크게 만드는 왕, 알렉상드르 뒤마·샤토브리앙·볼테르·프루스트를 인용하며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는 박식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 시절 프랑스어 문화권의 지적풍토도 엿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철저한 조사를 거쳐 소설로 재구성하면서 이렇게 기발한 문학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짜 넣으니, 저자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대로, “문학은 역시 더할 나위 없는 문학적 자료”임을 공감하게 된다.
문학가이자 시인이며 역사가인, 그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도 늘 왕의 반응에 전전긍긍하는 ‘왕국의 사료편찬관’. 게다가 왕의 말과 글까지 담당해야 하는 이런 캐릭터의 인생역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풍부한 이야깃거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