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로 주자학을 소개하고 싶었다. 20세기적 관심에 의해 ‘선택된’ 주자학이 아닌 주자학의 전모를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자니 원래 주자학이 그런 것만큼이나 이 책 역시 주제의 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일정한 관심에 의해 주목된 익숙한 개념이나 명제들을 분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생생한 주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자어류』처럼 주제 중심으로 잘 정리된 언설뿐만 아니라 서문序文이나 상소문 같은 주자의 명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온전히 소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주자를 소개하는 것은 그저 12세기로 돌아가 주자를 만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20세기의 ‘해석’을 논박한 뒤 나의 해석을 투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기·심성·수양의 도덕형이상학이 아니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구체성·일상성·체계성에 주자학의 특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인仁 본체나 양지良知 같은 도덕형이상학이 다였다면, 『사서장구집주』나 『의례경전통해』와 같은 방대한 텍스트 그리고 서원·향약·사창 등과 같은 정치한 장치들은 아예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주자 역시 ‘본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본체는 오직 ‘일상’ 속에서 구현된다. 때문에 주로 본체만을 얘기했던 20세기의 ‘주자철학’은 편면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주자는 내면의 철학자가 아니다.
더 나아가 주자가 강조하는 구체성·일상성·체계성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문명전환의 시대에 참으로 요구되는 ‘원칙’들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관계·공존은 유학 일반의 메시지다. 주자학도 여기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자의 공헌은 그것들을 입증하기 위한 사상의 ‘체계’와 더불어 그것들을 일상에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자학이 동아시아 800년을 지배할 수 있었던 까닭이며, 우리가 여전히 주자학을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목차
저자의 말 여는 말: 주자학의 안과 밖
1장. 왜 주자학인가?
위상과 평가 / 전기와 저작 / 지금 왜 주자학인가?
2장. 주자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역사적 시선: 성학 · 국학 · 관학 / 구조적 시선: 내성 · 외왕 / 분과적 시선: 철학 · 사상사 · 경학
3장. 도덕적 인간 - 본성
도덕은 목적인가? / 불교와 본성 / 도덕은 본성인가? / 본성이면 다 되는가?
4장. 인간 본성 기원론 - 천인합일
도덕의 존재증명 / 천명과 본성 / 본성과 악한 현실
5장. 존재를 읽는 두 개의 시선 - 태극음양론
대대와 유행 / 이기론의 두 얼굴 - 존재론과 본체론 / 태극론인가 이기론인가? 이기론에서 유행과 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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