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번역된 서양 철학은 어렵다. 한국어로 쓰여 있음에도, 한국인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 도대체 번역 과정에서, 아니면 한국어에 무슨 사건이 있었길래, 한국어로 번역만 되면 철학이 종잡을 수 없는 학문이 되고 마는가? 어째서 철학책을 읽을 때마다 독자는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문해력을 한탄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고발장이자 보고서이다.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영어 번역본과 두 권의 한국어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주요 단어들을 엄밀하게 분석한다. 이 분석은 명확성, 난이도, 정합도, 소통 가능성이라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해 각각 80회에 걸쳐 수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양 철학의 본모습을 가린 일본어의 장막이 벗겨진다.
서양 철학의 정수를 회복해 주는 것은 별게 아니다. 한국인이 평범한 생활에서 사용하는 보통의 단어로 철학하면 된다. 그런데 수많은 단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어디까지가 한국어인가? 저자는, “학생들이 카페에 모여 나누는 대화 속에서, 직장인이 식사하면서 혹은 술을 마시면서 주고받는 언어 속에서,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정치인들이나 시민활동가들이 청중에게 호소하는 문장에서 평범하게 사용하는 단어, 그것이 우리 한국어”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38개의 단어를 선별하여, 영어 번역어를 기준으로, 기존의 일본식 단어를 분석한 후 더 알맞은 우리말을 제안한다.
이 책의 목적은 평범한 한국어로 서양 철학의 정수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 그 목적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한국어로 철학하기를 방해하는 일본어 족쇄의 존재가 밝혀진다.
목차
철학이란 무엇인가(16쪽)|어디까지가 한국어인가(21쪽)|새로운 번역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25쪽)|이 나라에서는 일본어로 철학을 번역한다(29쪽)|언어 유린의 무한 순환 사건의 전모(34쪽)|단어 토폴로지(38쪽)|
인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막상 인문학 책을 펼치면 어렵다. 자신이 공부만큼은 좀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인문고전을 읽을라치면 어려운 단어에 백기를 든다. 그래서 대부분 쉬운 해설서에 만족할 뿐, 혼자 힘으로는 고전을 읽지 못한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출판되었다. 당신이 머리가 나빠서 읽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우리말이 일본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실태를 섬세하게 보여주면서, 혼자 힘으로 인문학에 입문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거의 매년 일본에서는 철학 개념을 해설하는 책들이 출판된다.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우리말로 번역된다. 이 책은 이런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질문한다. 어째서 한국어로 철학하지 않는가? 어째서 평범한 한국어에서 단어를 찾지 않는가?
일본에서 철학 용어 해설집이 많이 출간되는 이유는 현대 일본인들조차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자기들의 언어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서 철학 용어가 현명하게 선택된 게 아니라, 일부 지식인이 단어를 발명한 후 사람들이 그것을 매뉴얼처럼 암기해 왔다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올바르게 개선해 봄직하다. 그러나 일본은 개선보다 해설을 택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해설집이 유행처럼 한국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까닭은 우리나라 철학 용어가 일본어 한자를 음역해서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철학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어 한자와 같다. 퍼즐처럼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러므로 일본 책들을 수입하는 것은 유용하고 슬기로운 일처럼 보인다. 이 땅의 지식인들은 그런 퍼즐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철학 용어의 상당수가 우리말에 맞지 않아 폐기돼야 한다면, 일본어에 중독된 퍼즐 놀이는 의심스러운 일이 된다. 이 책의 장점은 추상적이거나 선언적인 수준의 비판을 넘어섰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단어 토폴로지 기법을 통해 일본식 한자어가 이 땅에서 얼마나 철학을 핍박해 왔는지 증명하며, 일본식 번역이 서양 철학의 정수를 담아낼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함을 수치로 보여준다. 독자들은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평범한 한국어를 통해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보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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